범수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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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범수(范雎)는 전국 시대 진나라의 재상으로, 위나라 출신이다. 위나라에서 수고를 섬기다 제나라 사신으로 동행했을 때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위나라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의심을 받아 고문당하고 변을 당했다. 간신히 도망쳐 진나라로 망명한 후, 소양왕에게 '원교근공책'을 제시하여 재상으로 등용되었고, 외척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권력을 잡은 후에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보답하고 원한을 갚았으며, 백기를 모함하여 죽게 했다. 말년에는 채택의 권유로 은퇴했으며, 사후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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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수 (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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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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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범 (范) |
이름 | 저 (雎) |
자 | 숙 (叔) |
시호 | 응후 (應侯) |
생몰년도 | 기원전 3세기 |
국적 | 중국, 진 |
출생지 | 위나라 |
관직 | |
직위 | 승상 후 |
봉읍 | 응 (應)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정수 (正壽) |
2. 생애
범수는 위나라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불우하게 자랐다. 위나라 중대부 수고를 섬기다가, 수고를 따라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제 양왕은 범수의 능력을 높이 사 금과 물품을 주려 했으나, 범수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수고는 범수가 위나라의 비밀을 누설했을 것이라 의심하여 재상 위제에게 보고했고, 위제는 범수를 고문하고 변소에 버리는 등 심한 모욕을 주었다.[1] 범수는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정안평의 도움을 받아 숨어 살면서 '''장록'''이라는 가명을 썼다.[1]
이후 진나라 사신 왕계의 도움으로 진나라로 도망갔으나, 소양왕에게 바로 등용되지는 못했다. 당시 진나라 재상 양후는 선태후의 동생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백기를 등용해 주변국을 정벌하며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정복한 영토는 양후와 그 친척들이 차지하여, 그들의 재산이 왕실보다 많았다.[1]
일 년 남짓 지난 후, 범수는 소양왕에게 상소를 올렸고, 소양왕은 범수를 불렀다. 범수는 일부러 후궁들이 다니는 길로 들어가 왕을 알현하려 했다. 환관이 이를 제지하려 하자, 범수는 "진나라에 왕이 어디 있느냐? 태후와 양후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소양왕의 이목을 끌었다. 범수는 소양왕에게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제시하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아 한나라를 압박하는 성과를 거두어 소양왕의 신임을 얻었다. 이어 범수는 소양왕에게 양후 일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왕권이 위험하다고 경고했고, 소양왕은 선태후, 양후, 화양군, 고릉군, 경양군을 함곡관 밖으로 추방했다.[1]
권력을 장악한 범수는 응(應) 땅의 후작으로 봉해져 응후(應侯)로 불렸다. 위나라에서 진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고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범수는 초라한 차림으로 수고 앞에 나타났고, 수고는 범수가 살아있음에 놀라며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범수는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일한다고 답했다. 수고는 범수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비단 솜옷을 주며 진나라 재상 장록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범수는 자신의 주인이 장록을 안다며 마부를 자처해 장록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수고는 먼저 들어간 범수가 나오지 않자 문지기에게 물었고, 범수가 바로 진나라 재상 장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수고는 범수에게 과거의 잘못을 사죄했고, 범수는 수고를 비난했지만, 수고가 비단 솜옷을 준 옛정을 생각해 살려주었다. 범수는 수고에게 위나라 왕에게 위제의 목을 가져오라고 전하라 명했고, 그렇지 않으면 대량성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귀국한 수고는 위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위제는 조나라 평원군에게 도망쳤다.[1]
이후 범수를 추천한 왕계가 범수에게 보답을 은근히 요구하자, 범수는 불쾌했지만 소양왕에게 청하여 왕계를 하동태수로 임명했다. 또한 정안평을 추천하여 장군으로 삼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답하고, 원한을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복수했다.[1]
소양왕은 범수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평원군을 진나라에 불러 위제를 죽이라고 협박했지만, 평원군은 거절했다. 소양왕은 조나라 효성왕을 압박했고, 효성왕은 군사로 평원군 저택을 포위했다. 위제는 조나라 재상 우경과 함께 도망쳤으나, 위나라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결했다. 효성왕은 위제의 목을 진나라에 보냈고, 평원군은 풀려났다.[1]
백기의 명성이 높아지자, 범수는 이를 꺼려 소양왕에게 중상모략해 백기를 죽게 만들었다. 그 후임으로 정안평을 장군에 앉혔으나, 정안평은 조나라 군사에게 포위당하여 항복했고, 왕계는 타국과 내통한 죄로 사형당했다. 이러한 일로 범수는 위태로워졌지만, 소양왕의 신뢰는 변함이 없었고, 추천자의 죄에 연좌되지도 않았다.[1]
이때 유세가 채택이 상앙, 오기, 문종 등의 예를 들며 은퇴를 권했다. 범수는 이를 받아들여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범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사기』에는 범수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수호지진묘에서 출토된 『편년기』에는 소양왕 52년(기원전 255년)에 "왕계와 장록(범수)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범수가 왕계와 함께 처형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
2. 1. 초기 생애와 위나라에서의 박해
범수는 위나라 사람으로, 집이 가난하여 불우하게 살다가 위나라의 중대부(中大夫) 수고를 섬겼다.[1] 수고가 위왕의 명을 받아 제나라로 사신으로 갈 때 범수도 동행했다.[1] 이 때 제 양왕이 범수의 말이 마음에 들어 금 10근과 소, 술을 하사했는데, 범수는 이것을 받지 않았다.[1] 그런데 이를 본 수고는 범수가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흘린 대가로 이러한 물건을 받았을 것이라 의심했다.[1]수고는 위로 돌아와 재상 위제(魏齊)에게 이를 보고했다.[1] 위제는 부하를 시켜 범수를 고문해 갈비뼈와 이빨이 부러졌다.[1] 범수가 죽은 척하자, 그를 변소에 버리고 술에 취한 빈객들에게 소변을 보게 하여 욕을 보였다.[1] 범수는 간수에게 “당신이 나를 나갈 수 있게 해준다면, 나는 반드시 그대에게 후한 사례를 하겠소”라고 말했고, 간수는 위제에게 시체를 버리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범수를 놓아 주었다.[1] 이후 범수는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도망가 숨었고, '''장록'''(張祿)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1]
2. 2. 진나라 재상 등용
범수는 집이 가난하여 불우하게 살다가 위나라 중대부 수고를 섬겼다. 수고가 위나라 왕명을 받아 제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범수도 동행했다. 제 양왕은 범수의 능력을 높이 사 금 10근과 소, 술을 하사하려 했으나 범수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수고는 범수가 위나라 비밀을 제나라에 누설했을 것이라 의심하여 귀국 후 재상 위제에게 보고했다. 위제는 범수를 고문하여 갈비뼈와 이빨이 부러졌고, 변소에 버려 술 취한 빈객들이 소변을 보게 하는 등 모욕했다.[1] 범수는 간수에게 후한 사례를 약속하며 도움을 청했고, 간수는 위제에게 거짓 보고를 하고 범수를 풀어주었다. 이후 정안평의 도움으로 도망쳐 숨어 살며 '''장록'''이라는 가명으로 바꾸었다.[1]진나라 사신 왕계가 위나라에 왔을 때, 정안평은 왕계에게 범수를 진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고, 왕계는 이를 수락했다. 진나라에 들어간 왕계는 소양왕에게 범수를 추천했지만, 소양왕은 바로 등용하지 않았다.[1]
2. 2. 1. 원교근공책과 외척 세력 축출
범수는 집이 가난하여 불우하게 살다가 위나라 중대부 수고를 섬겼다. 수고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동행했는데, 제 양왕이 범수의 능력을 높이 사 금과 물품을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그러나 수고는 범수가 위나라의 비밀을 누설했을 것이라 의심하여 재상 위제에게 보고했고, 위제는 범수를 고문하고 변소에 버리는 등 모욕했다. 범수는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정안평의 도움으로 숨어 살며 '''장록'''이라는 가명을 썼다.[1]진나라 사신 왕계의 도움으로 진나라로 도망갔으나, 소양왕에게 바로 등용되지는 못했다. 당시 진나라 재상 양후는 선태후의 동생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백기를 등용해 주변국을 정벌하고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그 영토는 양후와 그 친척들이 차지하여 왕실보다 재산이 많았다.[1]
범수는 소양왕에게 상소를 올려 후궁들이 왕래하는 길로 들어가 왕을 알현했다. 환관이 제지하려 하자 "진나라에는 태후와 양후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 소양왕의 이목을 끌었다. 범수는 소양왕에게 '''원교근공책'''(멀리 있는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전략)을 제시하며, 위나라를 공격하고 한나라를 압박하여 소양왕의 신임을 얻었다.[1]
범수는 소양왕에게 양후 일파를 제거해야 왕권이 강화된다고 주장했고, 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여 선태후, 양후, 화양군, 고릉군, 경양군을 함곡관 밖으로 추방했다.[1]
2. 3. 복수와 보은
범수는 집이 가난하여 불우하게 살다가 위나라의 중대부(中大夫) 수고를 섬기게 되었다. 수고가 위나라 왕의 명을 받아 제나라로 사신으로 갈 때 범수도 동행했는데, 제 양왕이 범수의 말솜씨에 감탄하여 금 10근과 소, 술을 하사하려 했으나 범수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수고는 범수가 위나라의 비밀을 누설한 대가로 물건을 받았다고 의심하여 귀국 후 재상 위제에게 보고했다. 위제는 범수를 고문하여 갈비뼈와 이빨을 부러뜨렸고, 범수가 죽은 척하자 변소에 버려 욕을 보였다. 범수는 간수에게 후한 사례를 약속하고 탈출하여 정안평의 도움으로 숨어 '''장록'''(張祿)이라는 가명을 썼다.[1]진나라 사신 왕계가 위나라에 왔을 때, 정안평은 왕계에게 범수를 진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고, 왕계는 이를 수락했다. 진나라에 들어간 왕계는 소양왕에게 범수를 천거했지만, 바로 등용되지는 않았다.[1]
일 년 남짓 후 범수는 소양왕에게 상소를 올렸고, 소양왕은 범수를 불러들였다. 범수는 일부러 후궁들이 다니는 길로 들어가 왕을 알현하려 했다. 환관이 이를 제지하려 하자 범수는 "진나라에 왕이 어디 있느냐? 태후와 양후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 소양왕의 이목을 끌었다. 범수는 소양왕에게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제시하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아 한나라를 압박하는 성과를 거두어 소양왕의 신임을 얻었다. 이어 범수는 소양왕에게 양후 일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왕권이 위험하다고 경고했고, 소양왕은 선태후, 양후, 화양군, 고릉군, 경양군을 함곡관 밖으로 추방했다.[1]
권력을 장악한 범수는 응(應) 땅의 후작으로 봉해져 응후(應侯)로 불리게 되었다. 위나라에서 진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고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범수는 초라한 차림으로 수고 앞에 나타났고, 수고는 범수가 살아있음에 놀라며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범수는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일한다고 답했다. 수고는 범수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비단 솜옷을 주며 진나라 재상 장록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범수는 자신의 주인이 장록을 안다며 마부를 자처해 장록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수고는 먼저 들어간 범수가 나오지 않자 문지기에게 물었고, 범수가 바로 진나라 재상 장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수고는 범수에게 과거의 잘못을 사죄했고, 범수는 수고를 비난했지만, 수고가 비단 솜옷을 준 옛정을 생각해 살려주었다. 범수는 수고에게 위나라 왕에게 위제의 목을 가져오라고 전하라 명했고, 그렇지 않으면 대량성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귀국한 수고는 위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위제는 조나라 평원군에게 도망쳤다.[1]
이후 범수를 추천한 왕계가 범수에게 보답을 은근히 요구하자, 범수는 불쾌했지만 소양왕에게 청하여 왕계를 하동태수로 임명했다. 또한 정안평을 추천하여 장군으로 삼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답하고, 원한을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복수했다.[1]
소양왕은 범수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평원군을 진나라에 불러 위제를 죽이라고 협박했지만, 평원군은 거절했다. 소양왕은 조나라 효성왕을 압박했고, 효성왕은 군사로 평원군 저택을 포위했다. 위제는 조나라 재상 우경과 함께 도망쳤으나, 위나라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결했다. 효성왕은 위제의 목을 진나라에 보냈고, 평원군은 풀려났다.[1]
2. 4. 백기 모함과 말년
범수는 가난 때문에 불우하게 살다가 위나라 중대부 수고를 섬겼다. 수고를 따라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제 양왕이 범수의 능력을 높이 사 금과 소, 술을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그러나 수고는 범수가 위나라의 비밀을 누설했을 것이라 의심하여 재상 위제에게 보고했다. 위제는 범수를 고문하여 갈비뼈와 이빨을 부러뜨렸고, 범수는 죽은 척하여 변소에 버려지는 모욕을 당했다.[5] 간수와 정안평의 도움으로 탈출한 범수는 '''장록'''(張祿)으로 이름을 바꾸고 진나라 사신 왕계의 도움으로 진나라로 망명했다.[5]진나라에서 범수는 소양왕에게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제시하여 신임을 얻었다. 또한 소양왕에게 왕권 강화를 위해 선태후, 양후 등을 함곡관 밖으로 추방할 것을 진언하여 관철시켰다. 권력을 장악한 범수는 응(應) 땅의 후작으로 봉해져 응후(應侯)로 불렸다.
위나라가 진나라의 공격 정보를 입수하고 수고를 사신으로 보내자, 범수는 초라한 행색으로 수고를 만나 생존을 알렸다. 수고는 옛정을 느껴 명주 솜옷을 주며 진나라 재상 장록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범수는 자신이 장록이라 밝히며 수고를 놀라게 하고 과거를 꾸짖었지만, 옛정을 생각해 살려주며 위나라 왕에게 위제의 머리를 요구했다. 위제는 결국 자결했고, 범수는 원한을 갚았다.
범수는 왕계를 하동태수에, 정안국을 장군으로 추천하는 등 은혜를 갚았다. 또한 사소한 은혜에도 반드시 보답하고, 작은 원한에도 반드시 복수했다.
백기의 명성을 꺼린 범수는 소양왕에게 중상모략하여 백기를 죽게 만들었다. 정안평과 왕계가 각각 항복과 내통 죄로 처벌받으면서 범수는 위태로워졌지만, 소양왕의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이후 유세가 채택이 상앙, 오기, 문종 등의 예를 들며 은퇴를 권하자, 범수는 이를 받아들여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2. 4. 1. 죽음에 대한 이설
범수의 몰년은 전래 문헌에 기록되지 않았는데, 1975년에 발굴된 《수호지진간》(睡虎地秦簡) 중 진나라 말기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기록한 〈편년기〉(編年紀)에 “(소왕) 52년, 왕계·장록이 죽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범수가 왕계와 같은 해인 기원전 255년에 죽었다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혹은 범수가 왕계와 함께 처형되었다고 하기도 한다.[5][6]『사기』에 따르면, 범수는 치사하여 생애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 시황제 시대의 수호지진묘 11호 묘에서 출토된 『편년기』의 소왕 52년(기원전 255년) 기록에는 "왕계와 장록(=범수)가 죽다"라고 적혀 있어, 이에 따르면 범수는 왕계에 연루되어 처형된 것으로 추측된다.[2]
3. 평가
북송의 소철은 범저의 행적에 대해 "재상으로서 진나라에 이익이 된 것은 적고, 해를 끼친 것은 많았다"고 비판했다.[3] 범저가 권하여 소양왕이 조정의 권력을 전횡하던 위염을 실각시킨 것은 옳았지만, 선태후까지 물러나게 한 것은 모자간의 정을 끊어놓은 처사였다.[3] 또한,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백기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왕계와 정안평을 기용한 것은 인사의 실패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과 병사들의 좌절을 초래하여 범저의 공적은 위염에 비해 십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3] 소철은 범저와 채택은 스스로의 영달을 위해 계책을 낼 수는 있었지만, 진나라에 유익한 것은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엄하게 평가했다.[3]
참조
[1]
서적
資治通鑑
北宋
[2]
서적
中国古代史研究の最前線
星海社
2018
[3]
서적
宋大家蘇文定公文抄
[4]
서적
한비자
[5]
서적
수호지진묘죽간 역주
소명출판
2010
[6]
논문
전국시대(戰國時代) 열국(列國)의 봉군(封君) 존재형태(存在形態)
중국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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